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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진화론 주장처럼 조금씩 나아지는 거죠.

 

하지만 역사는 무시 못합니다.

 

바랑인 올레그가 882년 슬라브인들과 세운 첫 국가인 키예프 공국이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이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의 시초이기도 하므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본래 한 뿌리다. 

 

당시 키예프 루스인들은 겨울에 벌목을 해서 만든 목재로 작은 배를 만들어 각기 특산물을 가지고 키예프로 집결한 후, 드니프르 강을 따라 함께 흑해로 내려간다고 했다.

 

키예프에서 집결했다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이유는 페체네그족의 약탈과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랑인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공국이 10세기 사이에 하자르 칸국을 쳐부수고 장악하던 흑해와 북유럽을 잇는 하천 교역로를 정복하였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를 구성하던 공국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시절 키예프 공국의 볼로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인다.

 

이는 유대교를 믿은 하자르 칸국이나 이슬람을 믿는 불가르족,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왕국[3]같은 이웃 경쟁자들과 키예프 공국을 차별하려는 의도였다.

 

9세기 동로마 제국의 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대 모라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1제국에 선교를 하면서 만든 키릴 문자가 나중에 키예프 루스에도 도입된다.

 

이 시기의 키예프 공국은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스칸디아비아와 흑해를 잇는 교역을 바탕으로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압바스 왕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직수입한 문물을 통해서 서유럽보다 더 발전된 문화를 자랑했었다.

 

 불가리아어를 바탕으로 한 교회 슬라브어로 중세 초부터 중세 말까지 러시아의 연대기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나 행정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았으며 안정되지 않은 공위 계승권 문제로 잦은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앙집권은커녕 공위 계승권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공위 계승권자들이 서로 다른 도시를 다스리며 내전을 벌이는 일이 흔했고, 흑해 연안의 페체네그, 쿠만인들과 같은 유목민들과 지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종종 야로슬라프 1세가 페체네그족 침략자들을 궤멸시키거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루스를 재결합할 때도 있었지만,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교역로가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키예프가 위치한 드니프로 강 일대의 비옥한 흑토 지대는 키예프 공국이 강성하던 당시에는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탁 트인 평야 지대인 특성상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기 힘든 위치였다.

 

이상으로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알아 보았는데요.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기에, 우리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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